나를 표현하는 3가지 키워드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가슴에 닿는다. 늘 그런 생각 하면서 살지만
실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 나이 돼서도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대학초년생 시절 선배가 그랬다. '너는 언제나 어른될래?'. 책도 읽고 자기주관을 뚜렷이
가지고 뭐 어쩌고 저쩌고...그런데 '너는 맨날 놀고 실없이 웃기는 소리만 한다'는
거였지. '주관이 뚜렷해야 한다고?''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거 없이 살아야겠다는게 내 철학입니다'
우스운 소리였고,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였다. 그때 겨우 스물두셋이었을 그 선배나
갓 스물 넘었을 나나 그야말로 우물안개구리였을 것이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상황에 비추어보건대 그야말로 구상유취.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이 분야의 생활태도 자체가
그렇다.
나이들면서 어느날 느끼게 된 것은 그렇다. 아하~ 내 스스로
철학없음을 태도로 삼아 살겠다고 했건만 내 지나온 자취를 돌이켜보니 그게 아니었구나.
내 속에 뭔가가 나무의 심 같은 것이. 작은 개울물이라도 그 중심을
이끌고가는 흐름같은것이 스스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리하여 주관이 스스로 공부하고
책읽어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고 책읽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고 마음에
물들어가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 늘 궁금하고 또 궁금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이었다. 대체 나란 사람은 뭐지?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남들이 보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 앞에서 좋게 이야기할 것이고 남 앞에서도 좋게 이야기할
것이며 혹 충고를 하더라도 기본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말일테니 철저하게 냉정한
판단이라 할 수 없을 터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냉정한
판단이 아니라 감정섞인 이야기를 하게 될테니 그도 또한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 궁금증 희미해지고 없어져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내 사는
세상, 남들이 뭐라던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할손가. 아주 관심없다 못하겠으나 이제
그런것에 많이 무뎌져서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문제는 스스로의 것이다. 늘
궁금하고 조바심이 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대체 어떤 말로 나를 표현해야
할까. 내 사는 모습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내 생각은 어떻게 전달해야할까...
가는곳 마다 프로필사진이 있고 아바타가 있고 미니미가 있지만 그런것들이 충분히
나를 표현하지는 못할터이고, 찾으려해도 마땅히 찾아지는것이 없다.
여기저기서 무슨 무슨
테스트니 게임이니 있으면 대개는 참여하는 편이다. 그래서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혈액형 A형에 키작고 배나온 중년사내. 딸 둘의 아빠.
이런게 무에 그리 중요할까. 대체 내가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궁금하고
알아보고 싶다.
마침 태터앤미디어에서 이런 이벤트를 한다고 하기에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주어졌다 싶어서 오전내내 머리를 굴려보았다.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 3개를
꼽으라면 어쩔것인가. 무엇으로 날 이야기해주어야 하지?
어느 후배가 내게
'형님은 아집으로 가득 차 있는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 그친구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냉정하기 때문이다. 냉철하다고 해야할까? 나는 그걸 '고집'이라고 말하곤
한다. 신념을 지켜가고 싶어하는 고집, 이라고 하면 너무 좋은 자평일까나?
어려서부터 고집이 무척 세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실은 그게 밖에서는
보이질 않는다는 소리도 들었었지. 남들 앞에서는 가능한 한 양보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남들 말을 귀담아 들어라. 그런 가르침은 아마도 심하게 각인되어서 성격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거, 나이들면서 서서히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타협할 수 없는 대원칙이라고 스스로 설정해놓고 움직이지 않으려는 버릇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물러나도 이것만은 안된다. 그래서 손해보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으므로 그럭저럭 스스로 웃으면서 위로하며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는데 고집스럽지 않다,
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충돌이 없을때 얘기일뿐. 어딜가나 지켜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심하게
고집을 부린다. 때론 그게 너무 심해서 인간관계를 아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는 경우도 있다만, 그러나 어쩌랴. 나는 내가 지켜야한다고 믿는 것을
지키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처음 떠오른 키워드가 고집이었다면 선후 가릴것
없이 떠오른 키워드는 '기독인'이다. 신앙인 이라고 하기도 하고 크리스찬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떤 단어든지 나는 '나 예수믿는 사람이요'하고 어디서든지 이야기한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까지 그러는건 아니지만 밝혀야할 자리라면 그걸 사양하지 않는다.
이건
후천적인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 사회가 천국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그런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왔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순 훼방꾼으로 역할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렇게 살아가고 싶고 그건 아이들이 생겨난 이후에 더 절실해진
꿈이다.
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싶은 욕심. 그건
내 신앙과 맞닿아있다. 신앙이라고 표현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늘 '나는 신앙인이다'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자부심이기도 하고 의무감이기도 하고 혹은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기도 하다.
세가지라 했으니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약사'일 터이다. 공부도 지지리도 않해서 실력도 없는 주제에 어디가서 직업얘기는
잘한다. 약사이므로 규정지어지는 온갖 모습들, 그게 나 일 수 밖에 없는
생활. 인생이 그렇게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모습을 스스로 놀라와하곤한다.
생각해보면
대학초년생 시절까지도 이런 직업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냥 학교만 다녔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이리도 소중한 직업을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 할
줄 아는것도 없으면서 그냥 이런 직업이 좋고, 매일같이 지겨워하면서도 천직이라고 믿고
있다.
결국 나는 고집센 기독교인 약사인 셈인가? 드러내놓고 나니
이렇게 별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중년사내였을 뿐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게 좋은
것을. 그 속에 담겨있는 수없이 많은 의미들과 모습들이 결국 가장 손쉽게
나를 표현하는 말들인것을...
충분치 않을것이다. 내가 단순히 저런 모습으로 100%
규정지어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디가서 명함 내밀기엔 그나마 간단명료하고 알아보기
쉬운 모습 아닐까 싶다.
태터앤미디어의 품앗이 이벤트 덕분에 그나마 조금
정리가 되는 것인가? 이런 이벤트 수없이 한다고 해서, 이벤트의 동기가 되어있다는
'나를위한 심리학'인가 하는 그런 책들 수없이 읽는다고 해서 얼마나 정확히 정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그러나 덕분에 한나절 정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서 정리해볼 수 있었다는것은 뜻밖에 얻어지는 소득이다.











